일과 삶의 경계가 흐릿할 때
책상에서 일어나도 일은 따라온다
보통 정해진 시간 없이 사무실을 나섭니다.
아침에는 8시쯤 출근합니다.
공식 출근시간은 9시 30분입니다.
퇴근 후 가족과 식사를 하고, TV를 잠깐 보고, 샤워를 합니다. 평범한 저녁입니다.
그런데 양치질을 하다가 문득 떠오릅니다.
“아, 그 고객사 견적서, 개발 중인 제품 개발 이슈가 어떡해 처리되고 있었지?”
수건을 들고 PC 전원을 켭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옵니다.
이게 일을 한 걸까요, 쉬고 있던 걸까요.
저는 이런 순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됩니다. 진짜 일하는 시간이 언제 끝나고, 진짜 쉬는 시간이 언제 시작되는지 – 솔직히 말하면 저도 모르겠습니다.
책임의 무게는 시간을 가리지 않는다
본부장이라는 자리에 앉으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책임은 출근과 퇴근의 경계를 지키지 않는다.
본부 직원들에게는 “연차, 주말의 휴식을 지켜라”, “쉴 때는 쉬어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심입니다.
하지만 정작 저 자신에 대해서는 그 원칙을 지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직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사람은 머릿속에서 결정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다음 분기 사업 계획, 진행 중인 프로젝트의 리스크, 핵심 인재의 동기부여, 신규 사업 기회의 타이밍
– 이런 것들은 회의실에 두고 나오기 어려운 것들입니다.
휴일 아침에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어떤 결정에 대한 답이 떠올라 한참을 누워 생각하곤 합니다.
그 생각의 시간을 ‘일’이라고 해야 할지, ‘삶’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둘 다인 것 같기도 하고, 둘 다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일과 삶을 분리한다는 신화
요즘 자주 이야기되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라는 개념을 저는 솔직히 잘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균형이라는 단어는 두 개의 분리된 것이 양쪽에 놓여 있을 때 성립합니다. 하지만 제 일상에서 ‘일’과 ‘삶’은 그렇게 깔끔하게 분리되지 않습니다. 서로 스며들고, 겹쳐지고, 때로는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좋은 책을 읽다가 조직 운영의 영감을 얻고, 카메라를 들고 산책하다가 신규 사업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가족과의 대화에서 본부나 팀 운영의 힌트를 발견하고, 동료와의 점심 식사에서 인생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 경험들을 굳이 ‘일’과 ‘삶’으로 나누어야 할까요?
저는 워라밸 대신 ‘워라하(Work-Life Harmony)’ 라는 단어가 더 맞다고 느낍니다.
균형이 아니라 조화. 분리가 아니라 어우러짐.
물론 이 표현이 자칫하면 “항상 일하라” 는 의미로 오용될 수 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조심스럽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24시간 일하라” 가 아니라, “분리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분리하려 애쓰지 말자” 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중요한가
일과 삶의 경계가 흐릿한 사람으로 살면서, 저는 몇 가지를 의식적으로 하려고 합니다.
첫째, 머릿속의 일을 외부로 꺼낸다.
머리에 일을 담아두고 다니면 어디에 있든 일이 따라옵니다. 메모, 캘린더, 작업 관리 도구 – 무엇이든 좋습니다. 머리 밖에 일을 놓아두면 그 순간만큼은 일에서 떨어질 수 있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거라는 신뢰만 있으면 됩니다.
둘째, 쉬는 시간의 질을 높인다.
경계가 흐릿하다는 건 ‘완전히 쉬는 시간’이 짧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짧은 시간이라도 진짜 쉬어야 합니다. 저는 카메라를 들고 나가는 시간이나 음악을 듣는 시간이 그렇습니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보는 그 순간 만큼은 머리가 비워집니다. 이어폰을 낀 시간동안 자유로워 집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활동이 하나쯤은 필요합니다.
셋째, 가족과 보내는 시간만큼은 지킨다.
다른 모든 경계가 흐릿해도, 이것 하나는 명확하게 두려고 합니다.
가족과 식사하는 시간, 부모님께 안부를 묻는 시간. 이 시간만큼은 일을 들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의식하는 것과 의식하지 않는 것의 차이는 큽니다.
넷째, 죄책감을 갖지 않는다.
주말에 일이 떠올랐다고, 휴일에 메일을 확인했다고 자책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제 일을 책임지는 사람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다만 그 시간이 가족이나 자신을 갉아먹지 않도록만 챙깁니다.
흐릿한 경계 속에서도 잃지 말아야 할 것
가끔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일과 삶의 경계가 이렇게 흐릿해도 괜찮은 걸까.”
답은, 사람마다 다를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는 명확한 경계가 평온함을 주고, 누군가에게는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이 충만함을 줍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저 자신에게는 한 가지를 잊지 않으려 합니다.
일이 삶을 잡아먹지 않게.
일에 책임을 지는 것과 일에 잠식되는 것은 다릅니다. 일을 사랑하는 것과 일에 묶여 있는 것은 다릅니다. 그 미세한 경계를 잃지 않으려고 매일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오늘 나는 일에 끌려가고 있는가, 일을 끌고 가고 있는가.”
이 질문을 잊지 않는 한, 일과 삶의 경계가 조금 흐릿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치며 – 흐릿한 경계 속의 균형
블로그라는 공간도 그렇습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이 일인지 휴식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업무 경험을 정리하고 있으니 일 같기도 하고, 좋아하는 글쓰기를 하고 있으니 휴식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간이 저에게는 가장 평온한 시간 중 하나입니다.
그러니 어쩌면 답은 단순할지도 모릅니다.
경계를 굳이 그으려 애쓰지 말고, 지금 이 순간을 충실하게 살아내는 것.
일을 할 때는 진심으로 일하고, 쉴 때는 진심으로 쉬고, 그 사이의 모호한 시간들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흐릿한 경계 속에도 분명히 존재하는 – 그 자기만의 리듬을 찾아가는 일.
그것이 본부장이든 팀원이든,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2026. 05. Rhapsody
카테고리: Frame & Life
